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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5/15 21:12120515 역대상16
역대상16:19-20
그 때에 너희 사람 수가 적어서 보잘것없으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백성에게로 유랑하였도다
주님이 다윗 왕의 입을 빌려 우리가 잊어버렸던 과거를 되짚어주신다. 스스로의 현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감사의 시작은 은혜의 기억이다.
유랑하였던 어린 나로부터 지금의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그건 바로 '말씀'이다. 중심축이 없어 보잘것없는 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말씀을 받는 온유함이 없어 품고 있는 사람도 적었다. 이 사실도 말씀을 몰랐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씀을 곱씹는 오늘, 여타 스승의 날과는 다르게 '기쁘게 감사'할 수 있었다. 과거 어리고 미숙했던 나를 대면하니 그런 나조차 받아주셨던 선생님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했던가. 그 부끄러운 과거를 홀대하지 말자. 과거를 들추는 사람에게 되려 고마워하는 의연함을 보이자. 부끄러운 과거만큼이나 오늘을 감사할 수 있으니까. 감사하는 나로 인해 주님의 성호를 자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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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5/15 21:10120514 역대상15
역대상15:26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들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작용-반작용"
: A가 B를 당기면/밀면 B도 A를 당긴다/민다.
역대상을 읽는 내내 이 이론이 자꾸 생각났다. 다윗이 어찌나 하나님께 민감한지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반응으로밖에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항시 기도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곁을 떠나실 틈이 없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엔 이와 같이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다. 환난일 때 의뢰하고, 도우실 때 감사 드리고, 복 주실 때 찬양해야 한다. 소통의 회복은 비단 개개인의 신앙보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수동적인 종교가 아님을, 사후에만 사활을 건 믿음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제대로 공을 주고받고 있을까. 엉뚱한 곳에 던지거나 빈 곳을 보느라 공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진 않나. 언약궤를 옮기며 풍악을 울린 다윗처럼, 바른 곳을 향해 영광을 돌리자. 아이처럼 천진하게 선함을 자랑하며 높이 찬양하자. 우리의 공을 놓칠 일 없는 주님께서 기쁘게 반작용하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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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5/15 21:07120430 야고보서5
"주 예수 뿐". 고작 이 네 글자가 요즘의 나를 뒤흔든다. 짧은만큼 추상적이고 추상적인만큼 어렵다 생각되는데,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간결하게 정리해주신다.
야고보서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힘들면 기도하고 기쁘면 찬양하란다. 그뿐이란다. 무얼 바꾸려기보다 여태껏 살아온대로 살되 단 주님과 함께 살란다. 혼자 '어떡하지' 하던 것을 '어떻게 하죠 주님?' 하면 끝이란다. 그것에 무게가 더해질 때 간구가 되고 그게 곧 하나님을 의뢰한단다.
이렇게 쉬운것이었나 싶다가 돌이켜보니 난 정말 나 혼자 살았다. "주 예수 뿐"이라면 나를 지워야하는데, 나를 지우려면 주님을 남겨두어야 하는데, 그분을 살아계신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나를 억지로 죽이려하니까 그게 힘들었던 것이다. 아차 싶다. 동행이 먼저였다. 함께 숨쉬는 게 먼저였다.
어려운 게 아니다. 찬 새벽공기를 들이마실 때, 아주 작지만 꿈틀대는 생명체를 볼 때, 과학이 이룩해낸 오늘날 사회를 조망할 때, 그런 때에 한 번씩 주님께 말을 거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걸 만드셨대요? 알수록 대단한 분이셔.
그 한마디에 세상이 조금 전과 달라진 기분이 든다. 이 한마디가 하루하루 꾸준히 늘어나고 지속된다고 생각해보면, 정말로 몇 년 뒤에는 세포까지 바뀌어버릴 것 같다. 주님께 자꾸 말을 거는 "주 예수 뿐"인 세포로. 함께 가자. 지금, 아주 깊게, 숨 쉬는 것 하나부터.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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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5/15 21:03120429 야고보서5
야고보서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흔히들 그런 말을 한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맞다. 모르는 사람은 없다. 행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할까 주의하는데 혹여는 그 때문에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생각보다 강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러한데, 어쩌면 애당초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절제하지 못했던 것들을 또 절제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지 말자.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끊을 수 있다.
인내는 억압적이어선 안된다. 작은 것이어도 꾸준한 게 중요하고 스스로 그 과정을 즐겨야 한다. 오직 주님뿐인 삶을 살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도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후는 순전히 우리 몫만 남았다.
에베소서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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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4/27 15:16120427 야고보서4
야고보서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부자가 되고픈 사람은 정말 돈을 원하는 것일까. 어쩌면 돈이 많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픈 건 아닐까. 부러움을 사서 사랑을 얻고픈 건 아닐까. 하나님 창조원리대로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도록 태어났다면, 실제로 물질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 너머의 것을 발견하지 못해 물질을 원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발견만 하면 사실 "왜 사는가" 따위의 거창한 질문도 쉽게 답할 수 있는 것 같다. 보이는 게 사라진 뒤 빛나는 거라곤 사랑과 믿음, 성품 뿐이니까.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물질을 포기하는 대신 필요없다고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사탄의 공작은 이제나 저제나 항상 있을 것이다. 현혹되지 않기 위해선 '진정 원하는 것'을 계속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틈틈이 되뇌이자.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요, 사랑이요, 사랑이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그 마음이요 말씀이요 본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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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4/27 15:13120426 야고보서3
야고보서3:14
그러나 너의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시기와 다툼을 자랑치 말라는 말을 보고 처음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그리고 곧 그런 사람이 태반이라는 걸 깨달았다. 복수극을 영웅담처럼 떠드는 것, 남을 정죄한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것, 청렴한 사람의 사소한 실수를 부풀리는 것. 모두 시기의 자랑이었다.
사람이 자랑하는 것을 보면 무엇을 중히 여기는 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중히 여기는 것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오직 예수' 외에 나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을까. 약속의 이행, 남몰래 한 배려, 타인의 칭찬. 은연 중에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있진 않나.
사소하지만 '자만'이라는 한 단어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거스르는지, 얼마나 나를 아둔하게 만드는지 깨닫게 된다. 주님이 자랑하라고 주신 복음에 열정 갖지 않은 내 모습이 부끄럽다.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자. 섣부르지 않게 화평하게 그렇게 온유한 지혜로 복음을 자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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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2/04/27 15:11120425 야고보서3
야고보서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선생에게 있어 좋은 학생이란 어떤 학생일까. 긴 입시기간을 거쳐서 그런지 이제는 서서히 '선생님이 좋아하는 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그건 바로 공부할 의욕이 있는 학생, 현명한 질문을 던지는 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경청하는 학생이다.
말조심하란 얘긴 아무리 해도 모자르고 또 그만큼 어렵다. 왜 어려울까? 왜 우리는 나쁜 말을 할까?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 끝에 겸손하지 못한 마음이 있더라. 비관적인 말을 하는 것도, 남을 욕하는 것도, 허세 부리는 것도 모두 그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어쩌면 나쁜 말을 줄이는 것보다 '겸손한 경청'이 먼저가 아닐까. 세 치 혀를 잘 다스려야 하지만 그건 혀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어서인 것 같다. 하루에 세 마디밖에 할 수 없다면 욕을 내뱉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겸손하게 귀기울이자. 모든 사람을 선생 삼은 학생이 될 때 그다지 많은 말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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